향토문화유적소개 총 6기의 고인돌이 대략 5~6m 간격으로 거의 일렬로 늘어서 있어 주민들은 ‘오형제바위’라 부른다. 대체적인 상석 방향은 강줄기의 방향과 비슷하다. 지석묘 6기 중 5기는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나 나머지 1기는 받침돌이 파손되어 반쯤 흙속에 묻혀 있다. 현재 주변지역은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김여지 묘는 김자지 묘와 함께 문중묘역의 앞단에 위치한다. 분묘는 부인 西溪 李氏, 草溪 鄭氏와 함께 매장한 합장묘로, 우측에는 새로 건립한 비와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문인석, 동자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舊碑의 앞면에는 ‘議政府左參贊諡文翼公金汝知之墓’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 洪熙乙巳라는 기명으로 보아 세종 7년(1425)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貞夫人 平壤趙氏와 雙墳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봉분의 규모는 높이 140㎝, 둘레 11.4m이다. 묘 앞에는 묘비를 비롯하여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45㎝, 폭 56㎝, 두께 28㎝ 이다. 비의 전면에는 ‘正憲大夫 刑曹判書 贈諡文靖 金公自知之墓 雙節貞夫人平壤趙氏부左’라 음각되어 있다. 金自知(1367~1435)는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호는 逸溪, 자는 元明, 密直堤學 濤의 장자로 金汝知의 형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앙덕리의 남한강변 江岸砂丘의 사질 충적대지에는 지난 1974년 팔당댐 수몰지구에 대한 문화재 조사시 7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중 1기는 그 당시에 발굴 조사되었고 최근 앙덕리 강변에 제방공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4기가 추가로 조사되었다.현재 앙덕리 마을회관 앞의 공원에 당시 조사된 4기의 상석이 이전 복원되어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고려 말 공민왕 때 무안 박씨의 선조인 諫議大夫 松林公이 당시 정계와 왕궁의 혼란을 피해 이곳에 낙향하여 시화장으로 건립한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고려 우왕 1년(1375)에 창건하고, 그 뒤 송림공의 6대손 이조참판 항양공 박원겸의 수학당으로 이용한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려 차레 중건을 거듭하였으며, 현 건물은 1974년 무안 박씨 중종에서 시멘트조로 복원한 것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신도비는 북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는데, 비의 형태는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비신은 대리석이다. 이수는 서로 마주보는 용문과 괴운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비는 광해군 13년(1621) 건립되었으며 마모가 심하다. 현재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비문은 申欽이 글을 지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의 전면에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이 갖추어져 있고, 1970년에 건립된 묘비가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安承禹(1864~1896)는 조선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啓賢, 호는 下沙, 본관은 순흥이다. 양동면 석곡리에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이춘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軍務都有司로 활약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정경부인 청주한씨와의 합장묘이다. 상석의 전면에 ‘左議政李公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문인석은 세워져 있지 않고, 묘의 우측에 위치한 묘비에는 ‘貞敬夫人淸州韓氏부左 有明朝鮮左議政李公墓’라고 음각되어 있다. 李端夏(1625~1689)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식의 셋째아들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조선중기의 문신이었던 李植(1584~1647)선생이 제자와 자손들의 교육을 지도하고 학문연구를 위해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한 것을 근년에 종중에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층 누각형식의 특이한 건물로써 팔작지붕에 겹쳐마 형식의 지붕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각 변 4.6m의 건물로, 2층 누에는 외각 1칸의 툇마루를 달았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새로이 단장된 형태이며 묘 앞의 상석 우측에 2개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대리석으로 제작한 작은 묘비 전면에는 한글로 ‘순국선열 이춘영의 묘’라고 음각되어 있고, 옥개석을 갖춘 묘비에는 ‘義兵將德水李公春永先生之墓 配孺人延安金氏부左’라고 새겨져 있다. 李春永(1869~1896)은 조선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友參 호는 槐隱, 본관은 德水, 양평출신이다. 고종32년(1895)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安承禹와 함께 의병을 모아 활약하다 충주전투에서 28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숭덕재공(1498~1562)의 휘는 윤경, 자는 중길, 호는 숭덕재, 본관은 광주이며 정재공 이수정의 장남이다. 신도비는 1562년 묘전에 세웠으나 현재 필자를 알기가 불가능 하여 198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석물로는 1단의 계체석 아래 중앙에 상석, 향로석 등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석은 4각, 망주석은 8각으로 되어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신도비는 이양우 묘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순종 2년(1908) 7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李愚冕이 짓고, 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신도비의 석재는 단백석으로, 높이 170㎝, 폭 61㎝, 두께 35㎝ 규모이다. 또한, 삼거리에서 묘소로 들어오는 어귀에는 完豊大君의 夫人인 南平 文氏와 慶州 金氏의 神壇이 모셔진 興愛壇이 위치하고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정부인 풍천임씨와 합장묘로, 서남향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봉분주위에는 호석이 돌려져 있으며, 묘 앞 좌우에는 2기의 묘비와 함께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좌측의 것이 원래의 것이며 우측의 것은 1963년에 개수한 것이다. 신도비는 숙종 16년(1690)에 건립되었으며 전면상단에 梳翁先生神道碑銘이 橫書로 篆刻되어 있고, 題額은 有明朝鮮國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梳翁趙公神道碑銘 書라 음각되어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본관 전주, 자 후경, 호 규당 ·탄재,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5년 안변부사로서 토문감계사가 되어 청나라 차관 가원계와 백두산정계비를 답사, 국경분쟁의 해소에 노력했으나 양국의 견해차로 실패했다. 그 후 덕원부사를 거쳐 1890년 참의교섭통상사무, 1892년 암행어사로 충청도에 나갔다가, 1894년 협판교섭통상사무를 거쳐 공조참의가 되었다. 석물로는 1단의 계체석 아래 중앙에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은 총 6점으로 수량이 타묘에 비해 적은 점이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조선 선조 때 함흥판관으로 재임한 柳希津의 충절을 기려 인조 5년(1627) 충신정각을 세우고 현판을 내려 표창하였으며, 정조 13년(1789) 문화유씨 24대손인 柳聖中의 부인 김씨의 정절이 높아 열녀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현재 건물은 출입문을 겸한 철제의 홍살문과 旌門이 마련되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새로 보수한 것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정경부인 양천하씨, 파평윤씨와 합장묘로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남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동자상,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인조 12년(1634)에 건립된 것으로 비명은 金柱宇가 글씨를 썼다. 신도비는 인조 13년(1635)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李明漢이 글을 짓고, 金柱宇가 글씨를 썼다. 비의 규모는 총 높이 204㎝, 폭 66㎝, 두께 17㎝ 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묘로서 남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비의 형태는 이수가 없는 월두형이다. 비문은 申欽이 글을 짓고 沈悅이 글을 썼다. 묘역의 남동쪽에는 선생을 제향하는 忠翼祠가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현재 간대와 기단 및 1기의 지주는 결실되고 1기의 지주만 남아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일인 경찰서장이 지주 1기를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하나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각면의 치석과 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말~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당간의 규모는 높이 305㎝, 폭 50㎝, 두께 36㎝이다. 주민에 의하면 이곳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연대미상의 석비로서 옛날 허씨가문의 며느리에 대한 효행비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석두는 투구형으로 그 수법은 사실적으로 장방형의 석좌위에는 연문이 장식되어 있다. 비의 재료는 화강암이며, 높이는 150㎝, 폭 50㎝, 두께는 19㎝의 규모이며, 석문은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전혀 불가능하다.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비의 형태로 보아 대략 조선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부군인 김인경과 합장묘로서 높이 180㎝, 전체 둘레 18.8m로서 높이 70㎝의 호석이 원형으로 돌려졌으며 용미, 활개를 갖추고 있다. 묘 중앙의 묘비는 月頭形으로 비좌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신은 前面에 ‘通憲大夫光川尉金公之墓 惠順翁主부左’라 음각되어 있다. 석물로는 1단의 계체석 아래 중앙에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상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혜순옹주는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과 그의 후궁 敬嬪朴氏의 소생으로 김헌윤의 아들 金仁慶에게 출가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세심정은 조선 중종, 명종 때의 학자이며 靜庵 趙光祖의 수제자로 이름높은 趙昱(1498~1557)선생이 기묘사화의 여화로 이곳에 은거하며 제자들과 더불어 도학을 강문하던 곳이다.세심정은 6각 원당형을 가미한 20여평의 아담한 목조건물인데, 지붕은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었다. 7개의 주초석 위에는 6각의 기둥을 세웠고, 2.5m 길이 6개의 툇마루가 부착되어 있으며, 내부는 속칭 우물 정마루를 깔았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貞夫人 錦城 朴氏와 합장묘로 봉분 하단에 40cm 높이의 호석이 돌려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었다. 묘비는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으며, 전면에는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贈謚 公尹承吉之墓 貞夫人錦城朴氏부左’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에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는 1973년에 건립한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는 새로이 단장되어 장대석의 호석이 돌려져 있고, 묘 앞에는 상석과 이수와 대좌를 갖춘 비 그리고 문인석, 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趙昱(1498~1557)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平壤, 자는 景陽, 호는 龍門, 보眞齋이다. 판관 守 의 아들이다. 중종 11년(1516)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조광조, 김식을 사사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시문과 서화에 능하였으며 서경덕, 이황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우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운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이 정자는 세조 6년(1460)에 대제학 梁誠之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택승정기에 의하면 순조 30년(1830) 양씨 선조들이 사용하던 활터에다 창건한 것으로 헌종 6년(1840) 병사 양주태가 현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자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초석위에 원주를 세운 굴도리집이다. 정면에는 梁大淵이 쓴 ‘澤升亭’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澤升亭記’ 현판이 걸려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봉황정은 서쪽산록의 자락이 東走하여 黑川과 마주친 단애상에 건립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세조6년(1460) 대제학인 양성지가 단월면 보룡리 보산정에서 돌아온 황룡을 위로하고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며, 정조 14년(1790)에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신도비는 원래 양근리 192번지에서 현 위치인 용문면 조현리 산48-13으로 옮겨왔는데, 현재 묘소의 입구에 南向하여 있다.장방형의 백색화강암 비좌와 비신 및 쌍용의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상부를 부드럽게 몰딩처리 하였다. 비신의 前 後面 상단에 횡으로 ‘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이라 했고, 碑題는 ‘有明朝鮮國贈領議政神道碑銘幷序’라 음각되어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고종 19년(1882)에 이곳 출신의 효자 崔匡岳과 崔秉培 父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팔작지붕에 三門형태의 목조건물이다. 중앙 상단에 孝子贈朝奉大夫崔匡岳之門 高宗十九年壬午九月日 命禎 현판과 우측에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崔秉培之門 高宗十九年壬午九月 日 命禎 현판이 걸려있다. 좌측실은 마루를 깐 낮은 누각으로 꾸며져 있는데 전체적인 건물규모는 정면 7.19m 측면 2.43m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이 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피화한 權景祐·權景裕 형제를 제향한 서원이다. 서원은 전학후묘형으로 강당이 앞에 있고 뒤쪽에 사우를 두었다. ‘수곡서원’이라는 제액이 달린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가진 초익공의 집으로 한식 골기와를 얹었으며, 좌우측면에 병풍판을 달았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칸의 규모로 중간에 마루를 깔고 좌우측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역은 약 50여평 규모로, 묘의 봉분 우측에는 묘비,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古碑로서 비두는 투구형이며 대석을 갖추었으나 마모가 심하여 비문의 판독은 불가능하다. 묘비의 재료는 화강석이며 규모는 높이 123㎝, 폭 36㎝, 두께 16㎝ 이다. 李勣(1162~1225)장군은 고려 고종 때의 무신으로 본관은 砥平이며 대장군 俊善의 아들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이 정려는 이춘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29년(1829)에 명정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이춘명은 조선 고종때 갈운리 출신의 효자로 효령대군의 17대손, 이후해의 3남이다. 현재의 정려는 근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1간(2.4m), 측면1간(2.48m)의 규모이다. 정문에는 ‘孝子旌閭閣’이라는 현액과 그 안에는 ‘孝子 贈 童蒙敎官朝奉大夫 李春明之門閣 上之卽位 十八年 命旌’이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묘의 좌우에는 높이 1m 내외의 곡장이 돌려져 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 석수. 망주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역에는 본래 재실 등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6.25때 소실되고, 현재는 주변에 기와편과 석편만이 산재해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정부인 파평윤씨와의 합장묘이며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1992년 묘의 우측에 후손들이 두 개의 비를 건립하였다. 金百先( ~1896)은 경기도 양평 출신의 항일의병장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춘영, 안승우 등과 함께 지평에서 항일의병에 가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