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유적소개 1752년(영조2) 이천서씨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 사암의 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때 낙향하여 연산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오랜 풍우로 인해 훼손되자 1829년(순조 29)에 현재의 반월산 남쪽 기슭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에 있는 충신각은 입향조인 노추소의 아버지인 임진왜란 공신 이우당(二憂堂) 노춘근(魯春根)을 모신 정려이다. 무안군 삼향읍 맥포리에 있는 충신각은 입향조인 노추소의 아버지인 임진왜란 공신 이우당(二憂堂) 노춘근(魯春根)을 모신 정려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도산사는 1930년 향교 유림들의 발의로 기효근, 기자현, 수허당 기종헌 등 삼선생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우로 매년 2월 22일 이들 세 명의 선생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도산사의 건물은 1997년 새로 증축하였으며, 행주 기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1777년 마을의 촌로인 성(成), 이(李), 박씨(朴氏)의 견몽에 구천을 방황하는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처음 설단하였다. 이후 1874년에 사우을 건립하였고 1899년(고종광무3)에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존되면서 훼철되었다가, 또다시 마을에 재액이 발생되고 연이은 흉년이 들자 1918년에 입묘(立廟)하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1-1973년에 중건한 것이며 이때 동암묘 묘정비(東岩廟 廟廷碑)도 건립되었다. 사도세자는 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모셔져오고 있으며, 현재도 당산제의 주신(主神)으로 되어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충효사는 1906년(고종10)에 운남면 주변의 김(金), 기(奇), 정(鄭), 이(李)씨의 4성 6인이 선대의 충효사상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김숭조와 임난공신(壬亂功臣)인 충렬공 정기인 등 그 충신과 기응세, 김상경, 정시철, 김필홍, 김성태, 이이주 등 일곱 명의 효자를 배향하고 있다.9인의 단비를 세운 후 1917년과 1921년에 개수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사우(祠宇)로 개축(改築)한 것이다. 현재 아홉 분의 단비는 1981년 사우(祠宇)건립 시 매몰되어 현존하지 않으며 사우의 정면 좌측에 1916년에 세워진 충효단비(忠孝壇碑)가 세워져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일로읍 죽산리 당월촌 마을회관 옆에 위치한 비각으로 영친왕 궁 언 장비(1903년), 경선궁 혁폐 선정 불망비(1907년), 군수 조진규 내언 비(1904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에는 장항포 수문이 있는 민가 옆에 설치되었다가, 농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이후 2013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우고, 무안군의 지원을 받아 비각을 세우고 주변 정비를 실시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1683년(숙종 9년) 무열공 배현경, 율헌 배균, 증암 배회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1803년(순조 4년)에 향내유림의 발의로 향현사가 되었다. 1846년(헌종 12)에 한 차례 중수된 후 서원훼철령(1868)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그 후 1893년에 청천사유허비가 건립되었으며(사우건립시 매몰) 1899년 단을 세우게 되었다. 1917년 청천사유허비각을 중수한 후 1946년 향내유림의 발의로 옛터에 중수하였다. 중건 시 달성군 배운용, 금헌 배정지(1257~1351), 정절공 배극렴(1325~1392), 희암 배명 등이 추배되었고, 2007년 청절당 배상옥(동학농민운동 무안지역 의병장)을 추배하였다. 청천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로 이용되기 하였다.
향토문화유적소개 태봉사는 1979년 달성배씨의 후손과 유림의 주창으로 1979년 상량하였고, 이듬해인 1980년 창건하였다. 태봉사의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는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상량의 기록으로 1863년 중수하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재실인 영모재는 건립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건물 상량(上樑)에 기재되어 있는 연도와 <영모당중수기(永慕堂重修記)>에 있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4회(廻) 계해(癸亥)’라는 기록으로 보아 1863년(계해)에 중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파평윤씨의 명조(名祖)들을 제향하는 분매사는 1750년(영조 26)의 후손들에 의해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에 창건하였던 것이다. 그 후 1서원훼철령(1868)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19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현재의 소재지로 이전 복설하였으며, 그 후 2차례의 중수를 거쳐, 1985년 현재의 새 건물을 구지(舊地)의 서편에 이건하였다. 윤길(尹吉)·윤덕생(尹德生)·윤예형(尹禮衡)·윤지원(尹之元)을 추배하여 현재는 4위를 배향하고 있다. 윤지원(尹之元)은 조선 인조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인물이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악은(岳隱) 노신(魯愼,1336~), 금계(錦溪) 노인(魯認, 566~1622)의 충의와 유풍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정조 13) 악은사(岳隱祠)라는 이름으로 나주군 문평면 동원리에 창건되었던 사우였다.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16년 현재의 소재지로 이건하였다.1966년 忠烈先祖들인 노일상(魯一相)·노봉(魯鴻)·노연백(魯淵白) 등을 추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일상(1842~)은 조선후기 무안지역에서 활동한 한학자로 저서로는 사례요람(四禮要覽)과 채기신편(采奇新編), 송록정요(宋錄精要)가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1836년 현 위치에 지은 이후, 1914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안채인 장춘오헌은 정면 8칸, 측면 2칸의 일자형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기와는 전통 한와가 올려있다. 건축구조는 대청의 규모 축소와 수장 공간(광) 확대, 그리고 창호의 디자인 등에서 근대 이후 한옥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건넌방 상부의 비밀 공간 확보, 2곳의 공루 설치 역시 본 가옥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향토문화유적소개 최익현·기우만·박임상 등 3명의 유학자를 모신 사우로 1945년 건립되었다. 박임상(朴琳相, 1864~1944,무안출생)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제자 수 십 명을 규합하여 최익현(위정척사 계열)의 진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智島 頭流에 壇을 설치하고 이항로·기정진·김평묵·최익현 등 네 스승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최익현과 기우만 선생의 사우를 건립하고자 부지를 다듬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뜻을 못 이루고 1944년 그 아들 현풍에게 두 선생의 사우를 꼭 세우라고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이에 박임상의 제자들과 자손이 합심하여 평산사를 건립하고 최익현·기우만 두 분 선생을 봉안하고 2년 후 박공을 배향하였다.